보물 및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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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보물 제1744호) 대웅전의 동·서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를 마련하여 대웅전으로 진·출입 할 수 있도록 꾸몄다. 불국사에 대한 문헌은 삼국유사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대웅전중창단확기(大雄殿重創丹雘記)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景德王代 大相大城以天寶十年辛卯始創佛國寺,歷惠恭世,以大歷九年甲寅十二月二日大城卒,國家及畢成...)’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751)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세종 18년(1436)에 중수하였으며, 성종 21년(1490)과 명종 19년(1564)에 중수가 있었으나,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 그 후 효종 10년(1659)에 중창된 후 숙종 3년(1677) 번와 보수, 숙종 34년(1708) 서쪽 기둥 교체, 영조 5년과 영조 6년(1730), 영조 7년에 개와(蓋瓦)를 보수하였다. 조선 영조 41년(1765, 乙酉)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조 41년(1767) 단청이 완료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後佛幀)을 영조 45년(1769)에 완성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바 있으며, 이어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도 개수되었다. 그 뒤 또 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대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불국사 대웅전 전면의 동측에는 다보탑이 배치되어 있고, 서측에는 석가탑이 배치되어 있다. 또, 대웅전 전면에는 팔각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으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계 형식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의 외관은 중앙의 어칸을 협칸(8.7尺)이나 퇴칸(8.2尺)보다 배이상 넓은 주칸(17.7尺)으로 꾸며졌다. 공포는 다포로 어칸에 3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었고, 협칸과 퇴칸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어 있다. 살미첨차에는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를 조각하였고,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대웅전 정면의 어칸은 사분합꽃살문이고, 협칸과 퇴칸은 쌍분합교살문이며, 양측면의 문은 삼분합띠살문으로 꾸며졌으며, 후면의 어칸은 사분합정자살문이며, 협칸은 벽체로 막았고 퇴칸은 분합정자살문으로 20칸중 10칸은 문을 설치하여 개방 했다. 기단은 면석에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에 갑석(甲石)을 덮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架構基壇)이다. 기단의 사면 중앙부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계단 양측의 소맷돌은 측면을 삼각형 문양으로 가공하였다. 천정은 우물 천정인데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게 꾸며졌다.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다. -출처/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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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보물 제61호) | 사리탑舍利塔(보물 제61호) 불국사 비로전 좌측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 · 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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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石槽(보물 제1523호, 불국사박물관 소장) 석조(石槽)는 큰 돌을 파서 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만든 용기로, 흔히 큰 절에 설치되었다. 불국사 석조는 일반적인 통일신라 석조의 형태인 직사각형 모양이지만, 다른 석조와는 달리 내부와 외부에 돋을새김 조각이 많고 모서리를 장식적으로 둥글게 한 점이 특징적이다. 내부에는 거대한 연꽃모양이 새겨져 있어 석조의 물속에서 연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효과를 주며, 외부에는 돌림띠를 돌리고 안상(眼象) 무늬로 장식하였다. 전체적인 모양새가 우아하고, 장식 또한 정교하여 통일신라 석조(石造) 미술의 뛰어난 조형의식을 보여주는 수작(秀作)이다. 불국사 석조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수조의 형상이 원형인 백제시대의 석조와 달리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형상인 직사각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내·외면에 조각이 있는 점과 다른 직사각형의 석조와는 달리 모서리를 둥글게 한 것이 특이하다. 특히 내부 바닥면의 화려한 연화문 조각은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뛰어난 조형의식과 높은 예술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인정된다. -출처/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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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 실측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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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식 석축架構式 石築(보물 제1745호) 자하문 앞에는 아름답게 축조된 가구식 석축과 조화를 이룬 청운·백운교가 놓였고, 그 앞에는 평지를 이루며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구품연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있다. 가람서쪽에 있는 극락전 중심의 구역은 대웅전구역보다 한 단 낮추어 배치되었는데, 여기에는 정면에 안양문을 세우고, 그 앞에는 연화·칠보교의 계단을 축조하였다. 극락전 주위에는 안양문과 연결하여 회랑이 둘러졌는데 동쪽에는 대웅전 회랑과 연결되어 별도의 회랑을 두지 않았다. 안양문과 자하문 앞에는 아름답게 꾸민 가구식 석축이 동서로 놓였는데, 동쪽 자하문 앞의 것은 백운교의 계단 위에서 단을 달리하여 상단의 석축을 변화 있게 꾸며 조화를 이루었다. 안양문 앞에서는 밑에서부터 수직으로 석축을 쌓되 중간 중간 칸을 이루어 다듬은 석주(石柱)와 인방석을 가구식으로 걸고, 그 가운데를 자연석으로 채운 행태이다. 자하문이나 범영루 앞의 하층 석축은 밑에서부터 거대한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가공석재를 가구식으로 짜 올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범영루의 돌출부 기둥 밑에는 점차형의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 돌기둥을 만들었고 또 석교 밑에서는 정교한 홍예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구역의 서측회랑 하부 석축이 포함되는데, 구조형식을 살펴보면 수직의 석주와 수평의 주두석 및 동자주, 초석, 갑석으로 장방형의 격자 틀을 형성하고, 그 안에 자연석을 밀실하게 채워 넣는 수법으로 쌓았으며, 대웅전 석축은 1단, 극락전 석축은 2단으로 구성되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출처/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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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靈山會上圖 四天王 壁畵(보물 제1797호) ‘불국사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慶州 佛國寺 靈山會上圖 및 四天王壁畵)’는 1769년에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와 상궁 김씨 등이 시주하여 제작한 불화로, 영산회상도와 2점의 사천왕 벽화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조성연대는 영산회상도에만 1769년이라는 연대가 있고 사천왕 벽화에는 조성연대 없이 화원의 이름만 적혀 있는데, 영산회상도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이 사천왕벽화를 그리는 데도 참여하였고 두 불화에서 인물표현과 채색 등에 유사점이 많은 것을 볼 때 영산회상도와 사천왕벽화는 같은 해에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화는 18세기 중후반 통도사와 봉정사 등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들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색감과 안정적인 구도 등 경상도 지역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영산회상도를 구성함에 있어 거는 그림과 벽화가 한 세트를 이루는 구성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조선 후기 불화조성의 한 면을 잘 보여주는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출처/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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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보살도(보물 제1933호) 이 불국사 삼장보살도는 1739년 밀기(密機), 채원(彩元), 서징(瑞澄) 등이 경주 거동사(巨洞寺) 오주암(五周庵)에서 제작하여 불영사에 봉안하였다는 분명한 화기를 남기고 있어 18세기 전반기 삼장보살도 도상 및 화풍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천장보살이 범협(梵夾)같은 지물을 들고 있다든가, 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의 협시가 좌우 대칭을 이루며 무장형의 인물을 배치하였다든가 하는 점은 이 삼장보살도가『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을 근거로 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팔공산 지역과 구미, 상주 일원의 경북 중북부 지역의 결합된 화풍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더불어 삼존을 동일선상에 수평으로 나란히 앉힌 구도는 시각적으로 안정을 구가하며, 인물의 세부 묘사력도 섬세하고 정취하다. 명도는 낮고 채도가 높은 붉은색과 녹색, 황색, 육색 계통을 주조 색으로 사용하여 종교회화가 지향하는 숭고함과 장엄함을 잘 표출하였다. 물론 앞선 시기의 담백한 담채풍의 맑고 명랑한 색채감에 비해 좀 더 짙고 탁해진 느낌은 있지만, 이는 시대적 미의식과 작가의 취향 등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구사된 선묘는 주로 변화가 드문 일정한 선을 사용하였으나, 머뭇거림 없는 붓질도 유려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강조색으로 사용된 백색은 색감이 또렷하게 돌출되어 평면적인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한 점도 기법상 주목할 만하다. 이렇듯 이 삼장보살도는 모든 면에서 18세기 전반기 불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며, 이 시기 화풍 및 삼장보살도의 도상 등 불화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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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사찰에서 의식이 있을 때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단다. 당을 매다는 긴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양쪽에 세운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나란히 서있는 2쌍의 당간지주 중 동쪽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이지만, 서쪽 당간지주는 기둥 크기와 제작 수법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 경내 입구 대석단 앞에 동서방향으로 2쌍이 나란히 서있다. 두 쌍의 당간지주 가운데 서편 당간지주는 좌우 기둥의 크기와 제작수법에 차이가 있어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편 당간지주는 전반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고 하겠으나 양 기둥의 하부가 절단된 것을 1924년도에 시멘트로 접합하였고 풍화가 진행되고 있다. 원래의 위치에 남아있는 동편 당간지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석조유물일 뿐 아니라, 전체적인 조형이나 장식적인 의장면에서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의 양식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편 당간지주는 당간지주의 원래 용도가 단절된 조선시대에 이르러 괘불을 현괘하기 위한 용도로 다시 고안된 사례로 중요한 문화사적 의의를 지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양 기둥의 양식이나 제작연대가 다른 것을 조합하고 있어 조형성이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출처/ 문화재청 |